글 모음집.tx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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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의 기억들을 반추하고, 뱉어내 흔적을 남기는 작업을 합니다.
떠난 이를 다시 볼 수 없다면 그와 나의 마지막 표정이 어땠는가를 생각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나눈 약속들을 생각해 봅니다. 완벽하게 이해할 수 없는 다면적인 세상 속에서, 로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나 상황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낄 때, 이런 상황에서 무기력에 빠지지 않기 위한 행위가 실제로 변화를 가져올 수 없더라도 삶을 유지하기 위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현실에서 무력감이나 두려움을 느낄 때, 잠시 그 현실에서 거리를 두고 관조하기 위해 작업을 시작합니다. 기억을 다면적으로 바라보고 곱씹는 과정을 통해 나와 외부의 관계를 인식하고자 노력합니다. 다양하게 변화하는 생각을 함께 늘어놓아, 기억의 공백을 상상으로 메우는 과정을 표현합니다. 긴 시간을 들여 판을 새기고, 이를 찍어낸 것들을 다루며 기억이 변해가는 과정을 은유합니다. 또한 직접 제작한 다양한 오브제들을 하나의 작업에 포함시켜 더욱 느슨한 우연을 만들어 냅니다.
왕가위의 작품 속 인물들은 모두 이상한 행위를 합니다. <중경삼림> 속 경찰 223번은 자신의 생일인 5월 1일까지 유통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하루 한 통씩 사 모으며 만우절에 이별한 연인을 기억합니다. <타락천사>속 사장이 장래희망인 하지무는 영업이 끝난 아이스크림 가게에 들어가 불타는 마시멜로우를 꽃은 아이스크림을 판매하기도 합니다. 마트 직원에게 날짜의 중요성에 대한 열변을 토하기도 하고(경찰 223번), 가게 심부름을 잊어버릴 정도로 청소에 열중하기도 하고(페이), 손님의 온 가족에게 아이스크림을 끊임없이 내어 주기도 합니다(하지무). 상식적이지 않으며 불완전한 행동은 쉽게 이해할 수 없어 보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기억과 관계를 다루는 방식을 따라가다 보면 그 행위의 원동력이 우리가 지닌 보통의 삶 속 고민들과 맞닿아 있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제가 작업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 또한 스스로의 원래 기억에 경도되지 않고, 대안의 가능성을 찾기 위함입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세상에 대한 인식은 완벽한 정복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유동적으로 만들어 나가며 점차 이해하는 것임을 알게 됩니다. 저의 세상은 타인과 맺는 관계를 통해 형성됩니다. 이 관계에서 무력감이나 두려움을 느낄 때, 내가 원하는 대로 현실을 바꿀 수 있는 터무니없는 세상을 상상해 봅니다. 어쩌면 저는 작업을 통해 세상에는 정해진 하나의 답이 없음을 이해하고, 오독의 가능성에 대한 압박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를 긍정하자는 이야기를 전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러한 태도가 현실에서 마주하는 다양한 어려움을 도피하거나 수용하려는 강박에서 벗어나 삶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방식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를 위해 저는 한 때 물리적으로 존재했지만 이제는 사라진 과거의 자취, 즉 기억과 흔적을 곱씹어 드러내려 합니다. 중립적인 오브제들에 대한 저의 감정이 기억을 바탕으로 새로운 모습을 띠게끔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기억과 상상을 재구성해 늘어 놓으며, 현실은 극복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답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임을 인정할 수 있게 됩니다. 어쩌면 저에게 작업은 수행의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특정 지점에서 완성되기보다는 다양한 해석이나 반응으로 지속되는 작업을 하고 싶습니다.저는 작업을 통해 상상이 기반이 된 비선형적 서사를 만들고, 여기에 다양한 형태로 살을 붙여 나가며 작업을 진행합니다. 또한 서사 구조 뿐 아니라 작업 과정을 통해 관계의 변화에서 일어나는 우연성과 필연성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데, 판화라는 매체와 기법을 이용하는 것은 비선형적 서사를 긍정하는 태도와 맞닿아 있다고 생각합니다. 최대한 복잡한 공정과 긴 시간을 들여 판을 부식시킨 흔적을 찍어내 기억의 반추와 소멸의 과정이 가진 의미를 전달합니다. 한 판에서 시작된 다양한 결과물들과 제작 과정 중의 다양한 실험 찍기 혹은 제작 중인 판들을 작업에 함께 포함시켜 늘어놓는 놀이를 통해 상상의 나래를 펼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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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ling the Gap in Reality Through Expressions of Imagination in an Open-Structure
This thesis is based on my series developed by reflecting on alternatives to reality or by looking at her vague memories from 2020 to 2021. This thesis is wrote based on my series about an alternative world I built and my vague memories of 2020 to 2021.
I felt it necessary to find a subject in the multi-lateral world that cannot be fully understood, extending my fear of death and my end. The fear and helplessness that follows might not really make things better. But even if I cannot overcome the obstacles that I am facing or lose control, this process is still very important for the sake of my survival and existence.
The world I built is based on the relationships I form with others. When feeling lethargic or fearful in these relationships, I imagine a world that makes no sense, where I can distort the reality. This is my way of escaping from the problems I face in the real world, helping me to accept the reality as it is.
In this process, I can realize that to successfully identify the world, I need to gradually build fluid relationships instead of perfect conquest. It allows me to understand that there is no only single answer in the world, and affirms things as they are by going beyond possibily misunderstanding. By this attitude I can truly liberate myself from the compulsion to face the challenges in any way- either by running away or surrendering myself.
I create non-linear narratives based on imagination, and advance them by adding various stories. I aim to leave my work unfinished and leave it to change form through various interpretations and responses.
Moreover, the work attempts to find meanings in contingency and inevitability occurring in the change of relationships - not only in the narrative structure but also in the work in progress. For example, how the medium and technique of print is used here parallels with my attitude that affirms nonlinear narratives. Traces I made to a printing plate through the most complex progress and longest time are left to deliver a message about the meaning in the reflection and the end of memories. Also, various results including experiments and incomplete work from one plate can be lined up together to express a multiplicity of imaginings.
These metaphors are created on the basis of my instinctive defense mechanism of trying to escape to my own safe zone. I realized that my previous works failed to facilitate communication between the artist and the audience.
Nevertheless, I chose to stick to spontaneousness and nonlinear narratives. This changed my attitude in delivering my thoughts through my work. And it turns out showing how fear confronts realities, one by one, through such a series. The looseness that is chosen by the progress in an extempore way of working and the long time required for making some distance from a feeling of helplessness in reality through achieving liquidity and nonlinearity, then seizes the necessary time to form a complete e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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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중인 걸 모르고
솔은 커다란 개집으로 숨을까도 싶었다.
그곳이라면 세상을 개만큼의 약한 시력으로, 띄엄띄엄한 색깔로 봐도 될 것만 같아서. 솔을 스치는 관계와 관계로 짜여진 공간은 흐릿한 형상들로 빼곡하다—자잘한 이야기가 웅성거리고—여럿의 얼굴이 흘러내리고—들숨과 날숨이 겹겹이 쌓이는—그림자마저 모두 뭉개져 섞이는—이곳에는 명징함이 없다. 솔은 불확실성이라는 문법으로 세계를 읽는다. 그러니까 이 방을 부유하는 형상은 온통 자의적이자 틀린 맞춤법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게 잘못은 아니지. 습관성 오독을 관계의 미학으로 두는 것은 일종의 얄궂은 전략이다. 오히려 상냥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품을 수 있는 관계가 많아지니 말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뾰족한 오차 값들이 여전히 따끔거릴 때가 있다.
그래서 솔은 당분간 다음의 팻말을 걸기로 한다 : 청소중
이는 정중한 부탁이자 조금은 소심한 경고다. 공간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니 양해해달라는 말과, 들어오면 미끄러질 수 있다는 주의의 말, 감췄던 것들을 끄집어내놓을 거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 문구가 가진 느슨함을 생각해 보자. 청소중은 보수중 혹은 공사중보다는 비교적 가벼운 시간성을 갖는다. 대단히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거라는 의미다. 또 한 가지는 위험성에 관한 것인데, 이미 청소중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어느정도 감수할 만하다. 발걸음을 좀 더 섬세하게 신경쓰면 될 일이다.
이 느슨한 속성을 이용해 솔의 세계를 기웃거려볼까 한다. 바닥에 놓인 세 개의 팻말에는 여러 감정 혹은 속엣말들이 경고의 표시처럼 붙어있다. 이는 겉으로 포착하기 힘든 내면의 언어가 있다는 것, 그것들은 말해지지 않고 암시로만 드러난다는 것을 떠올린다. 상대가 품고 있는 마음의 색깔과 형태는 그 변두리를 쫓아 어렴풋이 더듬어내는 수밖에 없다. 솔의 작업은 이와 같이 묵시적 형상을 매만지는 손길이다. 한 방울의 오차도 없이 타인의 모든 면면을 선명하게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솔은 차라리 경계 흐리기의 기법을 택한다. 따라서 벽에 걸린 회화 속 인물들은 고정적이지 않다. 어슴푸레한 형상 위로는 많은 이들이 겹쳤다가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그러니 몇 가지의 관람 팁을 주자면 다음과 같다.
글 지하운
청소중인 걸 모르고
솔은 커다란 개집으로 숨을까도 싶었다.
그곳이라면 세상을 개만큼의 약한 시력으로, 띄엄띄엄한 색깔로 봐도 될 것만 같아서. 솔을 스치는 관계와 관계로 짜여진 공간은 흐릿한 형상들로 빼곡하다—자잘한 이야기가 웅성거리고—여럿의 얼굴이 흘러내리고—들숨과 날숨이 겹겹이 쌓이는—그림자마저 모두 뭉개져 섞이는—이곳에는 명징함이 없다. 솔은 불확실성이라는 문법으로 세계를 읽는다. 그러니까 이 방을 부유하는 형상은 온통 자의적이자 틀린 맞춤법으로 그려져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게 잘못은 아니지. 습관성 오독을 관계의 미학으로 두는 것은 일종의 얄궂은 전략이다. 오히려 상냥한 구석이 있지 않은가? 품을 수 있는 관계가 많아지니 말이다. 다만 그 과정에서 떨어져 나온 뾰족한 오차 값들이 여전히 따끔거릴 때가 있다.
그래서 솔은 당분간 다음의 팻말을 걸기로 한다 : 청소중
이는 정중한 부탁이자 조금은 소심한 경고다. 공간을 관리하는 데 필요한 시간이니 양해해달라는 말과, 들어오면 미끄러질 수 있다는 주의의 말, 감췄던 것들을 끄집어내놓을 거라는 말이기도 하다. 그런데 여기서 잠깐 이 문구가 가진 느슨함을 생각해 보자. 청소중은 보수중 혹은 공사중보다는 비교적 가벼운 시간성을 갖는다. 대단히 오래 지속되지는 않을 거라는 의미다. 또 한 가지는 위험성에 관한 것인데, 이미 청소중이라는 걸 알고 있다면 어느정도 감수할 만하다. 발걸음을 좀 더 섬세하게 신경쓰면 될 일이다.
이 느슨한 속성을 이용해 솔의 세계를 기웃거려볼까 한다. 바닥에 놓인 세 개의 팻말에는 여러 감정 혹은 속엣말들이 경고의 표시처럼 붙어있다. 이는 겉으로 포착하기 힘든 내면의 언어가 있다는 것, 그것들은 말해지지 않고 암시로만 드러난다는 것을 떠올린다. 상대가 품고 있는 마음의 색깔과 형태는 그 변두리를 쫓아 어렴풋이 더듬어내는 수밖에 없다. 솔의 작업은 이와 같이 묵시적 형상을 매만지는 손길이다. 한 방울의 오차도 없이 타인의 모든 면면을 선명하게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기에 솔은 차라리 경계 흐리기의 기법을 택한다. 따라서 벽에 걸린 회화 속 인물들은 고정적이지 않다. 어슴푸레한 형상 위로는 많은 이들이 겹쳤다가 지나가기를 반복한다.
그러니 몇 가지의 관람 팁을 주자면 다음과 같다.
- 눈을 가늘게 뜨고 살펴보기—본인과 닮은 실루엣이 있지는 않은가?
- 살금살금 천천히 돌아보기—여기저기 놓여 있는 팻말과 조각을 주의해서 걷자.
- 끝까지 청소중인 걸 모른척하기—청소중일 때에야 많은 것들이 괄호 쳐지기 전을 볼 수 있으니!
글 지하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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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thout knowing it was being cleaned
Sol thought of hiding into a big doghouse.
She thought, in there, it would be okay to see the world with an eyesight of a dog. They have poor eyesight and see only selective colors. A place built by numerous relationships that Sol faces is full of blurry shapes — a buzz of small talk — shapes of different faces running down —inhale and exhale— even shades are all mashed — there is no lucidity here. Sol sees the world based on a grammatical rule called uncertainty. So all the shapes floating in this room is painted with arbitrary and wrong grammar. But this is not something wrong. It is some kind of sneaky strategy that puts habitual misinterpretation as aesthetics. Isn’t it rather friendly? There will be more relationships that you can embrace. There are, however, times that sharp errors that were made during the process of embracing sting.
So Sol decides to put up a sign : “Cleaning”
It is both a polite favor and a timid warning. It is asking for time to maintain the space, warning people that they might slip if they walk in, and tells people that things that were once hidden may be unveiled. But let’s dwell on the looseness of the word “cleaning”. It has more tentativeness than the word “under maintenance” and “under construction.” It means that it will not take too long. Another thing to consider is the risk. But it is somewhat bearable when we are already informed that a place is being cleaned. We just need to be a bit more mindful of our steps.
Such fluidity allows us to snoop around Sol’s world. Attached to the three signs on the floor, are emotions and unspoken words. This implies that there are hidden words that are hard to be spotted on the outside, and that those words are not spoken, but can only be revealed through implication. Her works are the touches that smoothen unseen figures. Knowing that she cannot clearly see or understand every aspect of others without a single drop of error, Sol rather chooses the technique of blurring boundaries. So figures of the paintings are not concrete or fixed. People repeatedly overlap and pass by the blurry shapes.
So below are some tips.
1. Squint your eyes — can you see a silhouette that resembles you?
2. Walk stealthily and slowly — mind the signs scattered around while walking.
3. Turn a blind eye to the fact that it is being cleaned — you can see more things before they are guarded by boundaries!
Written by Sie Haun
Without knowing it was being cleaned
Sol thought of hiding into a big doghouse.
She thought, in there, it would be okay to see the world with an eyesight of a dog. They have poor eyesight and see only selective colors. A place built by numerous relationships that Sol faces is full of blurry shapes — a buzz of small talk — shapes of different faces running down —inhale and exhale— even shades are all mashed — there is no lucidity here. Sol sees the world based on a grammatical rule called uncertainty. So all the shapes floating in this room is painted with arbitrary and wrong grammar. But this is not something wrong. It is some kind of sneaky strategy that puts habitual misinterpretation as aesthetics. Isn’t it rather friendly? There will be more relationships that you can embrace. There are, however, times that sharp errors that were made during the process of embracing sting.
So Sol decides to put up a sign : “Cleaning”
It is both a polite favor and a timid warning. It is asking for time to maintain the space, warning people that they might slip if they walk in, and tells people that things that were once hidden may be unveiled. But let’s dwell on the looseness of the word “cleaning”. It has more tentativeness than the word “under maintenance” and “under construction.” It means that it will not take too long. Another thing to consider is the risk. But it is somewhat bearable when we are already informed that a place is being cleaned. We just need to be a bit more mindful of our steps.
Such fluidity allows us to snoop around Sol’s world. Attached to the three signs on the floor, are emotions and unspoken words. This implies that there are hidden words that are hard to be spotted on the outside, and that those words are not spoken, but can only be revealed through implication. Her works are the touches that smoothen unseen figures. Knowing that she cannot clearly see or understand every aspect of others without a single drop of error, Sol rather chooses the technique of blurring boundaries. So figures of the paintings are not concrete or fixed. People repeatedly overlap and pass by the blurry shapes.
So below are some tips.
1. Squint your eyes — can you see a silhouette that resembles you?
2. Walk stealthily and slowly — mind the signs scattered around while walking.
3. Turn a blind eye to the fact that it is being cleaned — you can see more things before they are guarded by boundaries!
Written by Sie Ha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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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의 기억들을 반추하고 뱉어내 흔적을 남기는 작업을 합니다.
판화의 과정은 판을 상처내고 영구적으로 변형시켜 이미지를 새기는 일을 포함합니다. 재료의 물성을 감각하고, 판에 새긴 형상이 시간에 따라 부식되어 원래 상상했던 이미지와 다른 모습으로 다듬어져 가는 과정은 저의 느린 마음이 변화하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하나의 동판 위에 문장을 쓰고 부식하여 판화를 찍은 후, 다른 문장을 겹쳐 쓰고 다시 찍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담아내 보기도 니다. 여러 문장들이 중첩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7장의 에디션과 동판을 통해 마음 속 다양한 감정의 중첩을 보여주고, 연주가 가능한 전자 기판을 통해 문장들을 읊조리는 듯한 울림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Swimming Pool> 시리즈 등의 작업을 통해 이처럼 여러 번 찍어낸 자국(혹은 이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에 배치하거나 중첩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반복적으로 찍는 행위가 기억들을 반복해서 곱씹는 것이라면, 이를 완전히 소화시켜 보내주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 공간 속에서 판의 그림자들을 끊임없이 뱉어내어 어루만지곤 합니다.
판의 그림자 사이에 존재하는 기억과 흔적을 더듬어 덧칠하거나 소거하기도 합니다. 희미해지는 기억들을 여러 번 다듬어 지나간 시간들은 비로소 저를 이루는 요소가 됩니다. 이러한 과정의 중요성을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판화 워크샵을 진행하고, 작업세계의 확장과 고민의 흔적들을 보여주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Gate>는 강원도 인제와 제주에서 판화 워크샵을 열고, 여기서 발생한 대화 주제와 사진들을 아크릴에 드라이포인트로 새겨 문 형태의 구조물에 매달아 햇빛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그림자가 찍혀 나도록 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 기억이 중첩 가능한지에 대한 시각적인 실험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흔적을 다듬고 보여주는 다양한 방식들을 실험하고 싶습니다.
언어로는 온전히 표현할 수 없는 순간의 기억들을 반추하고 뱉어내 흔적을 남기는 작업을 합니다.
판화의 과정은 판을 상처내고 영구적으로 변형시켜 이미지를 새기는 일을 포함합니다. 재료의 물성을 감각하고, 판에 새긴 형상이 시간에 따라 부식되어 원래 상상했던 이미지와 다른 모습으로 다듬어져 가는 과정은 저의 느린 마음이 변화하는 모습과 유사합니다.
하나의 동판 위에 문장을 쓰고 부식하여 판화를 찍은 후, 다른 문장을 겹쳐 쓰고 다시 찍는 과정을 반복적으로 담아내 보기도 니다. 여러 문장들이 중첩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7장의 에디션과 동판을 통해 마음 속 다양한 감정의 중첩을 보여주고, 연주가 가능한 전자 기판을 통해 문장들을 읊조리는 듯한 울림 소리를 낼 수 있도록 만들었습니다.
<Swimming Pool> 시리즈 등의 작업을 통해 이처럼 여러 번 찍어낸 자국(혹은 이미지)를 다양한 방식으로 공간에 배치하거나 중첩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반복적으로 찍는 행위가 기억들을 반복해서 곱씹는 것이라면, 이를 완전히 소화시켜 보내주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간이 필요합니다. 그 공간 속에서 판의 그림자들을 끊임없이 뱉어내어 어루만지곤 합니다.
판의 그림자 사이에 존재하는 기억과 흔적을 더듬어 덧칠하거나 소거하기도 합니다. 희미해지는 기억들을 여러 번 다듬어 지나간 시간들은 비로소 저를 이루는 요소가 됩니다. 이러한 과정의 중요성을 사람들과 공유하기 위해 판화 워크샵을 진행하고, 작업세계의 확장과 고민의 흔적들을 보여주는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Gate>는 강원도 인제와 제주에서 판화 워크샵을 열고, 여기서 발생한 대화 주제와 사진들을 아크릴에 드라이포인트로 새겨 문 형태의 구조물에 매달아 햇빛을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그림자가 찍혀 나도록 했습니다. 다양한 사람들의 시간과 공간, 기억이 중첩 가능한지에 대한 시각적인 실험을 해 볼 수 있었습니다.
흔적을 다듬고 보여주는 다양한 방식들을 실험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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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불 붙은 양초가 모두 타버리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요. 무언가를 선언할 힘도, 이 관계를 주도할 용기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양초가 최대한 늦게 타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불이 꺼지기 전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이 관계는 영영 사라질 것 같은 얄팍한 걱정이 들었습니다. 이 찰나의 빛무리 같은 관계를 눈으로 쓰다듬은 다음 그 손길을 그대로 새기고 찍어냈습니다. 그런데, 잊지 않으려 곱씹다 보니 결국 사건의 기승전결 자체와는 다른, 어딘가 열화된 듯한 문장이 외워져버린 듯 합니다. 괜찮습니다. 처음과는 다른 조금 더 큰 창이 났군요.
당신에게 이 모든 풍경의 변화를 보여 주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ʻ우리’ 의 관계가 모호하지요. 나는 당신의 위선을 사랑하지만 당신이 떠난 이후에도 이곳에 머물러야 하기에, 모든 것을 보여주진 않기로 선택합니다. 어쩌면 내가 ‘가리는 것’ 그 자체를 보여주고 싶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별은 동그랗지만 당신들은 다섯개의 뾰족한 뿔로 그리죠. 형태를 잃어 가는 파도와 물결의 그림자를 더욱 곱씹습니다. 하지만 처음과 전혀 모양을 달리하게 된 우주들은 결국 모두 저의 다른 모습들입니다. 문장과 풍경들을 가려 보기도, 더욱 크게 써 보기도 합니다. 너와 나를 곱씹는 것이 전혀 다른 무언가에 대한 깨달음이 되면서 저는 오롯이 혼자 서고, 다른 우주로 넘어갈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군요. 무수히 찍어내던 달의 그림자에 구름을 둘러 장례식을 해 줍니다. 더 이상 ㅁㅁ를 찾고 내가 저지른 모든 걸 주워담기 위한 여행은 그만둘 겁니다. 그래도 이 여행은 끝이 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제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중경삼림>속 금성무가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조리 다 먹어치워 버리고 나서야 임청하라는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려 하듯이요.
그러니 당신도, 숨을 쉬기 힘들 것 같을 때, 혹은 무언가를 계속 잊어버릴 것 같을 때, 세 개의 우주를 기억하세요. 당신이 원할 때 어디로든 건너다닐 수 있으니까요.
우연히 불 붙은 양초가 모두 타버리면 우리는 무엇을 보게 될까요. 무언가를 선언할 힘도, 이 관계를 주도할 용기도 없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양초가 최대한 늦게 타기를 바라는 것 뿐이었습니다. 불이 꺼지기 전 내가 기억하지 않으면 이 관계는 영영 사라질 것 같은 얄팍한 걱정이 들었습니다. 이 찰나의 빛무리 같은 관계를 눈으로 쓰다듬은 다음 그 손길을 그대로 새기고 찍어냈습니다. 그런데, 잊지 않으려 곱씹다 보니 결국 사건의 기승전결 자체와는 다른, 어딘가 열화된 듯한 문장이 외워져버린 듯 합니다. 괜찮습니다. 처음과는 다른 조금 더 큰 창이 났군요.
당신에게 이 모든 풍경의 변화를 보여 주고 싶지만, 그러기에는 ʻ우리’ 의 관계가 모호하지요. 나는 당신의 위선을 사랑하지만 당신이 떠난 이후에도 이곳에 머물러야 하기에, 모든 것을 보여주진 않기로 선택합니다. 어쩌면 내가 ‘가리는 것’ 그 자체를 보여주고 싶은 지도 모르겠습니다. 별은 동그랗지만 당신들은 다섯개의 뾰족한 뿔로 그리죠. 형태를 잃어 가는 파도와 물결의 그림자를 더욱 곱씹습니다. 하지만 처음과 전혀 모양을 달리하게 된 우주들은 결국 모두 저의 다른 모습들입니다. 문장과 풍경들을 가려 보기도, 더욱 크게 써 보기도 합니다. 너와 나를 곱씹는 것이 전혀 다른 무언가에 대한 깨달음이 되면서 저는 오롯이 혼자 서고, 다른 우주로 넘어갈 준비를 할 수 있게 되었군요. 무수히 찍어내던 달의 그림자에 구름을 둘러 장례식을 해 줍니다. 더 이상 ㅁㅁ를 찾고 내가 저지른 모든 걸 주워담기 위한 여행은 그만둘 겁니다. 그래도 이 여행은 끝이 나지 않을 거라는 것은 제가 확신할 수 있습니다. <중경삼림>속 금성무가 파인애플 통조림을 모조리 다 먹어치워 버리고 나서야 임청하라는 새로운 사람을 알아가려 하듯이요.
그러니 당신도, 숨을 쉬기 힘들 것 같을 때, 혹은 무언가를 계속 잊어버릴 것 같을 때, 세 개의 우주를 기억하세요. 당신이 원할 때 어디로든 건너다닐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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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솔의 그림에는 설명하는 손과 표현하는 손, 지우는 손의 흔적이 뒤엉켜 있다. 설명하는 손은 대상의 외곽을 규정하거나 글을 적어, 형태나 의미를 명징하게 나타내려 한다. 표현하는 손은 분방한 움직임으로 작가만의 감각과 호흡을 화면에 불어넣음으로써, 감정이나 분위기와 같은 무형의 심상을 드러내려 한다. 지우는 손은 그려진 것 위에 다른 흔적을 남겨 앞서 앞선 흔적을 가리려 한다. 헌데 그의 그림 속에서는 세 가지 흔적 중 어떤 것도 구심점이 되지 못하고, 오히려 서로의 목적을 상쇄하며 혼재해 있다. 설명과 표현, 은폐 중 어떤 것도 온전히 달성하지 못한 그림들은 흡사 실패의 기록을 성취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에칭 연작 중 하나인 <Rest>를 보자. 배경의 식물, 전경의 테이블과 식기의 모양을 설명하던 선은 두 사람을 그리다가 돌연 신경질적인 움직임으로 그들을 지운다. 허나 긁어 만든 날카로운 선은 앞선 선들을 온전히 가리지 못한 채 실패한 부정의 흔적으로 남는다. 면(面)부식으로 만든 자국 또한 음영과 얼룩 사이를 오가며 상황을 복잡하게 만든다. <Stop>에서 선은 설명과 표현을 동시에 수행하려 하는데, 둘 중 어떤 것도 온전히 성취되지 않는다. 관객은 겹쳐진 두 인물을 볼 수 있지만 그 이상의 정황은 파악할 수 없다. 선들이 자아내는 동세를 느낄 수 있지만 그것이 무엇을 표현하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귀퉁이엔 썼다 지운 글이 있지만 우리는 여전히 그것을 읽을 수 있다.
함께 출품된 3점의 회화 연작을 보면 선명한 색의 추상적 얼룩들 가운데 큐브의 이미지나 섬광을 연상케 하는 표현, 분무하여 쓴 문장들이 뒤섞여 있다. 중첩된 얼룩들은 공간감을 암시하는 듯하나 이는 모호한 수준에 그친다. 또한 그것들은 특정 감정의 표현으로 수렴하지도 않으며, 그저 혼란스러운 상태를 구현하고 있을 뿐이다. 휘갈겨 썼음에도 무리 없이 읽을 수 있는 문장들은 작품의 제목을 통해 거듭 명시된다. 그러나 화면의 어떤 것도 문장의 의미를 적절히 보완해주지 못하므로, 특정한 해석에 닿지 못한 채 부유하게 된다. 의미는 물론 발신자와 수신자 또한 불분명한 이 문장들은 작가에게 그림이 하는 말처럼 보이기도 한다.
작가는 사뭇 달라 보이는 에칭과 회화 연작이 하나의 동일한 기억에서 비롯된 것이라 했다. 그렇다면 두 연작을 관통하는 표현적 특징–뒤엉킨 흔적들이 서로의 목적성을 상쇄해 되려 혼란스러움이 강조되는–을 해당 기억에 대한 심리적 반응의 발로(發露)라 말해볼 수 있지 않을까. 어떤 기억은 그 앞에 선 주체를 끊임없이 우왕좌왕하게 한다. 기억과 망각에의 의지 사이에서, 토로하고 싶은 마음과 말할 수 없음–혹은 꺼내 놓기 싫음–사이에서. 분명한 입장으로 정제될 수 없는 경험은, 지진계처럼 그 모순과 혼란의 양상을 낱낱이 기록하는 방식으로만 형식화될 수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시 서문 중, 임재형 글)
*우선 강솔의 경우, 전체적으로 두 가지 성격의 왜곡에 대한 작가의 고민이 작품들을 투과하여 흐르고 있다는 게 감지된다. 그중 한 왜곡은 전형적이고 전통적인, 따라서 보편적이고 오래된 것이다. 가령 “Love Your Hypocrisy(네 위선을 사랑하라/한다)”를 보라. 이 작품 내 문구는 누군가가 어느 건물 외벽에 스프레이 페인트로 낙서한 듯한 그래피티의 모습을 띠고 있는데, 그 낙서한 형식은 매우 전형적이고, 그 내용이 갖는 반어적 성격, 즉 타인의 위선에 대한 아쉬움을 ‘자-알 한다’라는 식의 어투로 오히려 사랑한다고 말하는 반어법 역시 전형적이다. 위선이라고 하는 표면과 내면 사이의, 그리고 표정과 감정 사이의 괴리라는 오래된 보편적인 왜곡을 역시 오래되고 보편적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런데 작품 전체는 전혀 그렇지 않다: 강솔은 그 전형적 형태의 낙서를 전혀 전형적이지 않은 형태의 배경에 담가서 용해시키는 듯한 상황을 연출했고, 용해 작용으로 인해 문자들이, 즉 전형적 언어가 해체되고 있는 듯한 인상을 풍긴다. 전형적 왜곡의 가장 무서운 함정이 그 오랜 세월에 걸친 반복으로 인해 새로운 진리라는 가면을 착용하게 되는 변이로 진화하는 것이라면, 즉 소수의 작은 거짓말로 태어나서 시작된 그 역사가 다수에 의해 다양한 규모로 오랜 세월에 걸쳐 모두의 거짓말, 모두의 왜곡으로 창궐하는 현재가 되는 것이라면, 강솔은 함정으로부터의 탈출 또는 함정의 회피를 선택하는 대신 함정의 분해를 선택한 듯하고, 그 분해의 방법론으로 자기만의 새로운 왜곡법을 고안한 것만 같다. 그러니까 왜곡을 왜곡하는 것이고, 이는 전통적 왜곡을 새로운 왜곡으로 중화시키는 게 아니라 변증법적으로 기존의 질서보다 강렬하고 참신하게 자신의 이상을 좇는 도전인 동시에 그 여정을 관객과 공유하여 관객에게 각자의 이상을 참신하게 좇을 수 있도록 하는 영감을 제공하는 것이다.
(전시 평론 중, 안재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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